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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정보

부산 청년 세계를 말하다 : 이스라엘 국가 날씨 환율 항공 이스라엘 하마스 상황 팔레스타인 아랍권 중동 전쟁 정리

by mr.차니 2023. 10. 13.

목차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인가?

    시차(한국과의 시차) 이스라엘은 한국보다 6시간이 느립니다.

    언어 헤브라이어, 아랍어

    화폐 이스라엘 신 셰켈 (ILS) / 1셰켈 = 338.12원 (2023년 10월 12일 기준)

    수도 예루살렘 (이스라엘 헌법상) / 텔아비브 (국제법상)

    면적 220만 7천 ha 세계 151위 (2021년 국토교통부 FAO 기준)

    인구 917만 4,520명 세계 97위 (2023년 통계청, UN, 대만통계청 기준)

    GDP 5,220억 3,345만 달러 세계28위 (2022년 한국은행 기준)

    기후 지중해 일대의 지중해성기후(Cs) 지역과 내륙의 반건조 스텝기후(BS), 사막기후(BW)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종교 유태교 74.8%, 이슬람교 17.6%, 기독교 2.0%, 드루즈 1.6%, 기타 4%

    정치 정부형태 : 의원내각제 / 주요인사 : 대통령과 총리 / 의회구성 : 단원제 (120석)

    경제 1인당 GDP : 5만 2,170 달러

    역사 유대민족의 역사는 기원전 17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중 2천 년의 역사가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13세기경 이스라엘 땅(Eretz Israel)으로 돌아와 야훼 신앙을 확립했다. 기원전 11세기에 건국된 이스라엘 왕국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대 왕국으로 분열되었다가 각기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해 차례대로 멸망하면서 유대인의 이산이 시작되었다. 영국위임통치기에 서서히 유대인의 유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1948년 이스라엘 독립이 선포된 직후 전 세계에 이산되어 있던 상당수의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이스라엘에 정착했다.


    이스라엘 날씨 (수도 기준)

    평균온도

    예루살렘에서 더운 계절은 5월 25일부터 10월 8일까지 4.5개월 정도 지속되며, 평균 일일 고온이 26 °C 이상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장 더운 달은 8월이며, 평균 고온은 29 °C이며 평균 저온은 19 °C입니다.

    선선한 계절은 12월 7일부터 3월 10일까지 3.1개월 정도 지속되며, 평균 일일 온도가 15 °C 이하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장 추운 달은 1월이며, 평균 저온은 5 °C이며 평균 고온은 12 °C입니다.

    구름 및 강수량

    예루살렘에서 12월 중 가장 흐린 달은 12월이며 흐림정도가 28% 정도입니다. 7월에서 9월 사이는 거의 맑음 100%로 가장 맑습니다. 7월에서 9월 그리고 12월을 제외한 나머지 달은 평균 흐림 25% 정도입니다. 비가 올 확률이 높은 달은 11월에서 2월까지입니다.


    이스라엘 교통 (부산 ~ 텔아비브)

    경유시간 (가는 편) 약 28시간 (오는편) 약 43시간

                      경유 후 도착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참고해서 여행스케줄을 계획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 하마스 상황

    <2023년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 관련 내용 정리>

    2023년 10월 7일 (토) 오전 6시 30분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며 시작되었다. 까심 로켓을 이용한 공습 등의 도발로 인한 충돌은 이전부터 간혹 벌어지던 일이었으나, 본 전쟁은 하마스가 로켓탄 공습을 넘어 아예 점령을 실행하여 지상전이 발생했다. 2014년 7월 가자 지구 분쟁 이후 9년 만에 발발한 이스라엘-하마스 간의 전면전이며, 1973년 제 4차 중동전쟁 이후 역대 최대 규모의 충돌이며 사망자만 본다면 이미 4차 중동전쟁을 넘어섰다.

    하마스의 기습 공격에 이어 이스라엘군의 보복 공습이 시작되었고, 현재 국지전으로 인해 이스라엘측 1천 2백여명, 팔레스타인측 1천 1백여명으로 양측 사망자만 2천 3백명을 넘어섰다.

    하마스는 어떤 단체인가?

    하마스는 '이슬람 저항 운동'의 약자로, 팔레스타인의 이슬람주의 정당으로서 군벌로 이루어진 테러 단체이다. 현재 가자 지구를 실효 지배하고 있으며, 2012년 12월까지 팔레스타인 입법평의회의 야당이자 다수당이었다.

    역대 중동 전쟁 배경 알아보기

    1차 중동 전쟁


    1948년 5월 15일부터 1949년 3월 10일까지 벌어진 중동 전쟁이다. 아랍권에서는 1948년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하여 1948년 전쟁이라고 부르고, 다른 말로는 이스라엘 독립전쟁이라고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1939년~1945년) 종결 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손을 떼게 되는데, 주인 없는 땅이 된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싸고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충돌이 지속되었고, UN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분할안도 아랍인과 유대인 양측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좌초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을 번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1차 중동 전쟁 개전 초기 절대적인 무기 부족에 시달렸다. 하지만 초기부터 3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고 전쟁 후반기에는 10만 명으로 병력을 증강했다. 그래서 초기 소수의 원정군만 보내면서 성의 없이 싸웠던 아랍군은 숫적 열세에 시달렸다.


    초기에 이스라엘군과 아랍민족해방군이 교전을 해오다가 팔레스타인 내부의 극심한 파벌 싸움과 각개 전투로 인해 팔레스타인은 생각보다 빠르게 붕괴되었다. 이를 보고 충격에 빠진 아랍연맹은 요르단, 이라크,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에서 지원자들로 이뤄진 아랍 해방군을 파견했고, 사우디 아라비아와 예멘은 자금과 지원병을 파견했다.

    전쟁 후반 이스라엘은 아랍연합군을 시리아와 레바논으로 몰아내고 갈릴리 지역을 점령했고, 그 다음으로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 대신 남쪽 네게브 사막을 향해 파상공세를 펼쳤다.

    전쟁 중 이집트는 요르단 견제에만 눈이 멀어 가자 지구에 팔레스타인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이에 뿔난 요르단은 이집트를 도와주지 않고,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반도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굴욕적인 이집트의 패로 인해 아랍 국가들은 각 나라 차례대로 이스라엘과 휴전을 체결했고 1949년 3월 10일 홍해와 접한 항구도시인 에일라트를 점령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스라엘 국기를 게양하면서 1차 중동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

    2차 중동 전쟁

    수에즈운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두 대륙의 경계인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서쪽에 건설된 세계 최대의 운하로 지중해의 포트사이드 항구와 홍해의 수에즈 항구를 연결하고 있다. 수에즈운하는 무엇보다도 아프리카 대륙을 우회하지 않고 곧바로 아시아와 유럽이 연결되는 통로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1956년 7월 26일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의 수에즈운하 국유화 선언을 하였고, 이집트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의, 아랍사회주의를 주창하며 이라크에서 영국의 입김을 제거하려 들었다. 또 알제리 전쟁에 개입해 반프랑스 게릴라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또한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과 계속된 제한 전쟁을 벌이는 팔레스타인 민족 게릴라인 페다이에게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수에즈운하의 국유화와 반식민주의로 게릴라들에게 지원을 일삼는 나세르의 이러한 행보에 영국은 나세르를 중동의 히틀러로 간주하였고, 이집트에 큰 위협을 느꼈던 이스라엘도 프랑스와 함께 동맹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제2차 중동 전쟁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군은 이집트와 전쟁을 하게 되면서 11월 5일에 수에즈운하를 장악하고 시나이 반도의 최남단까지 모조리 점령하게 되었고, 영국의 공수부대와 프랑스 외인부대가 도착해 이집트 3면이 적군의 공격을 받기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 UN의 중재로 1956년 11월 6일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철군하고 1957년 3월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전쟁은 종결되고 이집트의 외교적 승리로 끝났다.

    3차 중동 전쟁

    1967년 6월 5일부터 6월 10일까지 일어난 전쟁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감행했고, 단 6일 만에 대승을 거두어 엄청난 영토를 획득했던 전쟁이다. 6일 전쟁이라는 별명으로 매우 유명하다. 아랍 측에서는 6월 전쟁이라고 부른다.

    앞선 1,2차 중동 전쟁으로 인해 국제정세나 여론이 이스라엘에게 불리하게 작용했고, 세계의 눈치를 많이 보던 상황에서 전쟁 발발 시 UN의 개입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UN이 개입하고 중재하는 순간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작전을 중단해야 했다. 따라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UN이 개입하기 전 단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좁은 영토 때문에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제2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자국의 정보력을 모조리 쏟아 부어 주변국의 상황을 면밀히 조사하여 전쟁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인적자원의 불리함과 좁은 영토 때문에, 장기적인 소모 방어전에 유리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선제타격론으로 대표되는 예방전쟁이 군의 주요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시작된 전쟁은 6월 5일 아침 8시 50분 이스라엘 공군의 전투기 투입으로 단 3시간만에 이집트 공군력의 80%를 격파했고, 동시에 가자 지구와 시나이반도 공세를 통해 이집트군에 큰 손실을 입혔고 시나이반도를 정복했다. 또한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서 요르단군을 축출했으며, 시리아군에게도 반격을 가해 골란 고원을 점령했다.

    6월 11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당시 1,000명 이하의 사망자가 생긴 이스라엘군에 비해 아랍 연합군은 20,000명 이상이 사망한 대규모 손실이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영토는 3배나 커졌다.

    4차 중동 전쟁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은 1973년 10월 6일부터 10월 25일까지 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이 치른 전쟁이다. 욤키푸르 전쟁, 라마단 전쟁, 10월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전쟁은 1973년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 점령지에 기습적인 합동공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때는 이스라엘의 휴일인 욤 키푸르이자 이슬람의 신성한 기간인 라마단이 동시에 있었던 달이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휴전선을 넘어 각각 시나이반도와 골란 고원을 향해 진격했다. 미국과 소련은 전쟁 기간 동안 그들의 동맹국에 대량으로 물자를 보급했고, 이로 인해 이 전쟁은 두 핵보유 강대국의 대결 수준에 이르렀다.

    이전 세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이 모두 이스라엘의 압승으로 끝난 것에 비해 이 전쟁에서는 이스라엘군은 많은 군인들이 휴가로 인한 인적공백과 기습에 가까운 대규모 공격으로 인해 메이어 총리를 비롯한 수뇌부가 '나라가 망한거 아니냐'는 절망에 빠졌을 정도로 초반에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전쟁을 통해 이집트는 전쟁 목표였던 시나이 반도를 전후 협상(1975년 시나이 임시 조약과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을 통해 82년까지 점진적으로 회복에 성공했다.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반환을 대가로 이집트를 적성국 대열에서 반영구적으로 이탈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중동 산유국들이 이스라엘에 협력적인 국가에 석유 수출을 금하는 바람에 오일 쇼크가 발생해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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